재판부, "인터넷 뱅킹 하려면 20만원짜리 윈도 사라"
컬럼/IT 세상 | 2008/07/24 18:10
이런 기사가 떴습니다. : "공인인증서, IE서만 구동은 위법 아니다"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제목을 달려다가, 어차피 신문기사도 아닌데 하는 마음에 제 생각을 그대로 달아 보았습니다. 선정적이긴 하지만, 지금 상황의 심각성을 한 눈에 드러낼 수 있을 것 같아서요.
리눅스라는 운영체제를 아시나요? 신문 기사에서도 자주 나와서 많이들 알고 계실 거에요. 누구나 무료로 받아서 쓸 수 있고, 누구나 개발에 참여해 개선해나갈 수 있는 신개념의 운영체제지요. 그렇다고 기능에서 뒤지는 것도 아니에요. 응용프로그램의 수가 적고 고급 기능을 사용하에 조금 어려운 게 단점이긴 하지만, 보통 유저 수준의 간단한 기능이라면 윈도 못잖게 쉽고, 운영체제 자체의 성능도 윈도 이상이지요. 그래봤자 아무도 안 쓰지 않냐구요? 절대 아니에요. 한때 화제가 된 '개도국 아동을 위한 100달러 노트북'이나, 미국을 시작으로 센세이션을 일으킨 초소형 노트북 'EEE PC' 등이 바로 이 리눅스를 운영체제로 선택했습니다. 이미 개도국에서도, 선진국에서도 리눅스는 무료로 쓸 수 있는 훌륭한 대안 운영체제로 각광을 받고 있다는 것이지요.
초소형 노트북 EEE PC. 미국 최대의 인터넷 쇼핑몰 '아마존'에서 노트북 부문 판매량 1위를 달리고 있는 이 제품은 윈도가 아니라 리눅스를 운영체제로 채택했다.
그런데 이 리눅스에서 할 수 없는 일이 딱 하나 있어요. 바로 '한국의' 인터넷 뱅킹과 인터넷 쇼핑이죠. '한국의'에 따옴표를 친 이유는, 많은 선진국에서는 리눅스든, 매킨토시든, 윈도든 상관없이 인터넷 뱅킹이나 쇼핑을 마음껏 즐길 수 있기 때문이에요. 왜 우리나라에서만 인터넷 뱅킹을 할 수 없을까요? 바로 ActiveX 때문이지요.
많은 분들이 경험하고 계실 겁니다. 우리나라에서 인터넷 뱅킹이나 신용카드 결제를 하자면 웹브라우저 위에 이상한 노란 줄이 뜨면서 'ActiveX' 라는 것을 깔라고 강요를 하죠. 깔지 않으면 아예 먹통이 되어 버리구요. 은행이란 은행은 전부 이렇습니다. 특히 30만원 이상의 거래에는 반드시 '공인인증서'라는 것을 사용해야 하는데, 이것을 사용할 때는 무조건 ActiveX가 있어야만 합니다. 바로 이것이 문제의 시작이었지요.
ActiveX라는 것은 쉽게 말해, 웹브라우저 상에서 윈도의 응용프로그램을 바로 실행할 수 있게 해 주는 도구입니다. (어디까지나 이해를 돕기 위한 쉬운 표현일 뿐이에요.) 이 얘기는 무슨 얘기냐면, ActiveX를 깔려면 무조건 윈도를 써야 한다는 거에요. 한 술 더 떠, 마이크로소프트가 만든 '인터넷 익스플로러'라는 프로그램(윈도에 내장된 인터넷 프로그램. 'e' 모양 아이콘으로 유명하죠)을 쓰지 않으면 윈도를 쓰더라도 ActiveX를 깔 수가 없죠.
쉽게 말해, 말 그대로 "인터넷 뱅킹을 하려면 무조건 20만원짜리 윈도를 사야 하는" 것입니다. 뭐라고 미사여구를 동원해 변호를 하려 해도 결국 이게 현실이에요. 20만원이 아까우니 리눅스로 눈을 돌려보겠다? 안 되죠. 나는 디자인 쪽에 관심이 많으니 맥을 한 번 써 보고 싶다? 이것도 안 되죠.
리눅스나 맥 유저는 인터넷 뱅킹에 접근조차 할 수 없다. 국내 최대 은행이라는 국민은행은 놀랍게도 "컴퓨터상의 날짜를 확인하라"는 전혀 엉뚱한 경고 메시지를 내보내며 리눅스/맥 이용자의 접근을 차단한다.
저는 법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그래서 이 판결이 '법리적으로' 공정한지 불공정한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러나 이런 식의 판결이 한국 인터넷에 미칠 영향에 대해서는 아주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한국은 세계 인터넷에서 점점 도태되어 갈 것이고, 구식 기술을 끌어안고 있다가 자멸하겠지요. 이미 그런 징조가 보이고 있습니다. 윈도의 새로운 버전, 인터넷 익스플로러의 새로운 버전이 나올 때마다 "인터넷 대란이다! 모두 조심하라! 마이크로소프트에게 제발 이전 버전도 계속 지원해달라고 애걸복걸하라!"고 외쳐대거든요. 그런데 이상하죠. 마이크로소프트는 대기업이고, 매우 보수적인 회사에요. 변화의 속도도 아주 느려요. 실제로 세계는 마이크로소프트의 변화가 너무 느리다며 혀를 차고 있지요. 그런데 오직 한국만 마이크로소프트의 변화가 너무 빠르다며 괴로워하고 있는 거에요. 그만큼 정체된 것이고, 발전이 멈추어 버린 것이지요. 도태되어 가고 있는 것이지요.
게다가 ActiveX는 무지 위험한 기술이에요. '웹브라우저를 통해 응용프로그램을 실행한다'. 이 얘긴, ActiveX를 깔아놓는데 성공하면 사용자 컴퓨터를 쥐락펴락 하는 것도 가능해진다는 얘기죠. 인터넷 익스플로러 위에 노란 바가 뜨면서 뭘 설치하라고 하면 무의식적으로 동의를 누르는 사용자들이 많습니다. 무슨무슨 키보드 보안 프로그램이니, 해킹 방지 프로그램이니, 이런 것들을 보면 "아, 깔아야 되는구나"하고 까는 거죠. 그런데 알고보니 그게 오히려 해킹을 하는 프로그램이었다면? 사용자 컴퓨터의 자원을 마음대로 사용하는 프로그램이었다면? 끔찍하죠. 게다가 은행에서 깔라고 강요하는 '키보드 보안 프로그램'이니 '해킹 방지 프로그램'이니 하는 것들은 끔찍이도 불안정해서 컴퓨터를 멈추게 만들기 일쑤고, 느려터진데다 종료도 안 되고, 지워지지도 않는 악성 프로그램들이 많죠. ActiveX를 만든 마이크로소프트조차 ActiveX를 권장하지 않아요.
우리나라가 IT 선진국이었던 건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인터넷 뱅킹이나 인터넷 쇼핑에 ActiveX를 썼던 것도, 그때는 그런대로 명분이 있었지요. 우리나라 정부는 그 ActiveX와 공인인증서 기술을 세계적으로 전파하겠다는 야심찬 계획까지 세우고 있었다고 합니다. 어쩌면 ActiveX의 죄란, 한국 정부가 의도한대로 발전하지 않았다는 것 뿐일지도 몰라요. 하지만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국가가 세운 계획이 계획대로 잘 이루어지는 나라는 공산국가밖에 없어요. 세계 인터넷은 엄청한 속도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은 ActiveX라는 덫에 갇혀서 점점 도태되고 있습니다. 한국의 IT 인프라는 뛰어날지언정, 이미 한국은 IT 선진국이 절대 아니에요. 정부가 부디 세계를 향해 눈을 돌렸으면 좋겠습니다.
하기야, '하드디스크는 반납받았지만 서버 안에 이지원 프로그램이 남아있다'는, 컴퓨터를 한달만 배워도 안 할 개소리를 언론에 대고 자랑스럽게 떠벌려대는데 뭘 바랄까요.
